그날 전까지 내게 술은 소주와 맥주, 가끔 마시는 사케 정도였다. 와인이 이렇게 오래 남는 취미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네 사람뿐이던 첫 와인 모임의 밤은 취향 하나를 넓히는 데서 끝나지 않고, 낯선 세계를 배우는 즐거움을 처음으로 열어주었다.
모임은 작았다. 참석자는 나와 친구, 그리고 그날 자리를 준비해준 소믈리에와 모임장님까지 네 사람이 전부였다. 낯선 사람이 거의 없는 자리라 어색함보다 편안함이 먼저 왔고, 그래서 처음 듣는 와인 이야기도 더 가까이 들어왔다.
저녁 7시쯤 시작한 자리는 그날 준비된 와인들을 하나씩 열어가며 흘렀다. 지역과 품종, 향과 산도, 질감을 듣고 묻고 받아 적는 사이 처음 놓여 있던 병들은 어느새 비어갔다. 그런데 병이 비었다고 대화가 끝난 건 아니었다. 누군가의 질문과 또 다른 잔이 이어지며 테이블의 병은 아홉 병이 되었고, 밤은 새벽 4시까지 깊어졌다. 많이 마신 밤이라기보다, 더 듣고 싶어서 오래 머문 밤이었다.
네 사람뿐이어서 더 깊어진 첫 모임
처음이라 긴장할 수도 있었지만, 네 사람뿐인 테이블은 오히려 질문하기 좋았다. 모임장님은 흐름을 편하게 잡아주셨고, 소믈리에는 뉴질랜드의 생산지와 품종을 차근차근 풀어주었다. 모르는 말을 들어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바로 묻고, 다시 듣고, 잔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과정이 이상하게 재미있었다. 하나를 배우면 하나를 아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것이 더 선명해졌다. 예전에 커피를 배울 때 맛과 향을 따라가며 감각의 언어가 넓어졌던 것처럼, 와인도 들으면 들을수록 새로운 지도처럼 펼쳐졌다.
첫 병보다 오래 남은 배움
첫 흐름은 그날 처음 열어 본 뉴질랜드 화이트 와인에서 시작됐다. 라파우라 스프링스 쇼비뇽 블랑 같은 이름을 들으며 산도와 향, 지역의 기후가 잔 안에서 어떻게 느껴지는지 배웠다. 이전까지 술은 그냥 마시는 것이었는데, 그날부터는 읽고 듣고 비교하는 대상이 되었다.
헌터스 게브르츠트라미너는 와인이 한 가지 맛으로만 정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향이 먼저 다가오고, 그 향을 설명할 단어를 찾다 보면 같은 잔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문장이 되었다.
오하우 피노 그리는 또 다른 결의 화이트였다. 산뜻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질감과 차분한 과실감을 들여다보면서, 품종 하나가 바뀌어도 세계가 달라진다는 걸 처음으로 실감했다.
새벽 네 시까지 이어진 대화
레드로 넘어가자 이야기는 더 깊어졌다. 라파우라 스프링스 피노 누아를 마시며 같은 생산자 이름 안에서도 품종이 바뀌면 향과 분위기, 대화의 방향까지 달라진다는 것을 배웠다.
비틀 쥬스 피노 누아는 이름부터 기억에 남았지만, 더 오래 남은 건 그 병을 둘러싼 대화였다. 누군가는 향을, 누군가는 질감을, 누군가는 마신 뒤의 여운을 먼저 말했다. 준비된 와인들을 다 마신 뒤에도 대화는 끝나지 않았고, 각자의 감각을 꺼내 놓는 시간이 새벽까지 이어졌다.
포도노트의 시작이 된 첫 기록
그날 남긴 필기는 와인 이름의 목록이라기보다, 새벽까지 이어진 대화와 질문의 흐름을 붙잡아 둔 기록에 가까웠다.
포도노트는 결국 그 노트에서 시작됐다. 한 잔을 기록하면 다음 질문이 생기고, 다음 질문을 따라가면 더 큰 세계가 열린다는 감각. 소주와 맥주가 익숙했던 내가 와인을 배우며 처음 느낀 그 설렘을 오래 붙잡고 싶어서, 이 첫 글도 그 밤에서 시작한다.